왜 나는 지금 여기서 멈춰 섰을까

퇴사를 망설인 진짜 이유는 돈이 아니었다. 내가 30년 동안 쌓아 온 나만의 ‘신용’이라는 옷을, 어떻게 다시 내 손으로 디자인할지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30년 의료기기 현장을 거치며 단단해졌다고 믿었던 정체성이, 막상 회사 문을 나서려 하자 흔들렸다. 그때 쓴 글이 있어서 나름 정리를 해보았다.


멈춰 선 자리에서 던진 첫 질문

요즘 책상 앞에 앉으면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나는 왜 지금, 이 지점에서 멈춰 서 있는가?”

사람들은 퇴사 고민을 ‘돈 문제’와 연결시키려 한다. 노후 대비, 자녀 교육비, 자산 관리.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그렇게까지 단순한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다. 만약 돈만이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감정 소모가 큰 길을 택하지 않았을 거다. 더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50이 넘은 지금 시점이 되니 보이는 것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 회사에서 15년 동안 나를 이 자리에 붙잡아 둔 건 ‘재미’와 ‘배움’이었다. 새로운 제품의 개발부터 기획할 때의 기대감과 판매를 하면서 느끼는 긴장감 그리고, 후배가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뿌듯함,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맛. 그런 것들이 에너지였었다.

그런데 그 에너지가 멈췄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내가 후배들의 길을 막고 있다는 자각

40대 후반이 되니, 내 자리가 누군가의 천장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30년간 쌓은 나름 연결되어 있는 성과들이 매번의 미팅에서 ‘결론’처럼 포장되어 빠른 결정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곤 했다. 그게 싫었다. 내 경험이 후배들의 다른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이때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사자성어는 ‘좌정관천’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언뜻언뜻 느끼기도 했다.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스스로가 초라하고 비굴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대단한 실력이라기보다 ‘지인’이라는 얇디얇은 연결고리를 발판 삼아 올라선 자리는 아니었을까. 이런 의심이 들 때마다 30년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한참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시기는 대략 4년이 넘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힘이 빠졌고, 혼란에 빠졌다.


구조 탓을 멈추고 내 선택을 들여다봤다

처음엔 회사 탓을 하고 싶었다. 매트릭스 구조의 모순, 즉 위에서는 권한을 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통제하는 구조.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조직형 가스라이팅’ 같은 거. 이걸 좀 더 일찍 알아챘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대표의 태도가 달랐다면? 내 지위의 무게가 달랐다면? 가정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다. 그건 마녀사냥일 뿐이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다. 아니 나 스스로를 철저하게 처절하게 보고 싶었다.

대표와 나눈 수많은 대화를 되짚어 보면, 나는 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

“저는 모든 결정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내리는 사람입니다.”

이 문장이 내 정체성이고, 30년을 살아온 방식의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하다. 지금 이 결과는 외부 요인보다, 그때그때 내가 내린 ‘선택’과 그 선택에 쏟은 ‘집중’의 산물이다. 결과물은 그 선택의 물리적 결과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결론에 도달하고 나서야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30년의 긴 시간을 내가 계획적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5년도 길다. 당연히 그때 당시에는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을 내리고 행동했다. 단지, 방향성을 놓쳤을 뿐이다.


“돈이란 신용을 가시화한 것이다”라는 문장

그 무렵 읽던 책에서 이 문장을 만났다.

“돈이란, 신용을 가시화한 것이다.”

이 문장이 나침반이 됐다. 30년을 근면하게 살아왔다면, 그 시간 속에 분명히 ‘신용’이라는 자산이 쌓여 있을 거다. 통장 잔고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누적된 신뢰의 총합으로서의 신용.

그리고 이 신용이 바로, 내가 다시 일어설 때 딛고 설 땅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가치 즉 용역비를 확인하고 정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신용은 함부로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
내 신용을 오판하거나 오만하게 몰아세우는 상황에 휘둘려선 안 된다.
스스로를 낮추는 방식으로 정해서도 안되며, 회사 안에서의 내 위치에 따른 신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용을 입증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퇴사를 한 지금 나에게는 ‘제품’이 필요하다.
내 분신처럼 함께 다닐 수 있는 결과물 말이다.
그 제품이 나의 신용을 대변한다. 상품의 가치와 마진까지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30년의 신용은 스스로 져버린 셈이 된다.


내 신용에 맞는 옷을 다시 짓는다

모든 고민의 끝에서 도달한 결론은 단순했다.

‘내 신용에 맞는 옷을 입는 것.’

이건 직장을 옮기거나 직책을 바꾸는 물리적 행위 이상이다. 내가 나에게 부여하고,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나’라는 사람의 가장 정직한 정의를 다시 짜깁기하는 과정이다.

30년이라는 시간은 나를 단련시켰다. 그 시간이 빚어낸 옷이 분명히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 옷의 디자인을 회사가, 시장이, 인맥이 정해줬다. 이제는 디자인도 소재도 내가 고를 차례다.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재정의다. 더 이상 외부 평가나 조직 역학에 휘둘리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다. 논리적 사고와 성실함이라는 신용을 바탕으로, 내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태로 나를 재구성하려 한다.

이 새 옷을 입고, 다시 무대 위에 서기로 했다.

내 캐릭터
✏️ 한마디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데 있다.
특히 내가 고른 옷을 입고 설 때 그 영광은 온전해진다.”
—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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