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아비투스를 읽으며 깨달았다 — 나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

리디북스로 책을 주로 읽는다. 비욘 나티코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고 난 뒤,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책 목록을 훑다가 눈에 딱 걸린 제목이 있었다. 『아비투스』.

뭔가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 결제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첫 챕터부터 빠져들었다. 그 끌림이 무엇이었는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됐다.


아비투스란 무엇인가

아비투스(Habitus)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만든 개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몸에 밴 성향과 태도의 총체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사고방식, 언어 습관, 미적 감각, 행동 패턴. 이것이 곧 계급을 만든다는 것이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상류층의 대화 문화였다. 그들은 돈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는다. 대신 가족, 문화, 미래, 지역, 봉사활동, 스포츠, 이 여섯 가지 주제를 자연스럽게 다룬다. 그리고 그 대화를 어떻게 다루느냐로 상대방이 같은 리그의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돈은 벌 수 있지만, 아비투스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의식적으로 맞춰라”는 문장이 꽂혔다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최정상 리그에서 가장 선호되는 대화 주제는 가족, 문화, 미래, 지역, 봉사활동, 스포츠다. 이런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서 상대방이 자기에게 맞는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그러므로 표현 방식, 관심 분야, 미디어를 당신이 오르고자 하는 수준에 의식적으로 맞춰라.”

자극적인 문장이었다. 동시에, 딱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퇴사 후 개인 사무실을 낸 지 약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업적인 제안을 하기 위해 전 직장 대표와 미팅을 잡았다. 대표 대 대표로 대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고 나니, 나는 어느새 퇴사하던 날의 신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는데, 귀 볼에서 열이 났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상대방은 몇 가지 질문만으로 나의 현 상태를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아직 수준 미달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의식적으로 느꼈다.

그날의 패배감은 지금도 선명하다.


퇴사가 이미 전환점이었다

『아비투스』를 읽으면서 그날의 패배감의 원인이 비로소 정리됐다. 나는 창업을 했지만, 아직 창업자의 아비투스가 없었던 것이다. 명함은 바뀌었어도, 몸에 밴 성향은 여전히 부장 시절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좀 더 많은 경험과 시각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 미팅은 달랐을 것이다. 근시안적인 답변 대신, 더 넓은 그림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침묵이 흘러도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나는 ‘침묵을 받아들이자’는 것을 연습 중이다. 그 미팅에서 내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말을 채웠던 게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다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미 의식적으로 맞춰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퇴사 시점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던 사람에서, 능동적으로 판을 짜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실패를 해도, 한번 쌓아 올린 아비투스까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변화는, 밥상머리에서 이미 가족에게도 전파되고 있다고 느낀다.


4852는 출발점이다

나는 ‘4852’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48세에서 52세 사이, 인생 2막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라는 의미다.

퇴사를 결심하고, 창업을 하고, 블로그를 쓰고, 이런 책을 읽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나만의 아비투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몰랐는데,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2년 후 나의 아비투스는 어느 수준일지, 솔직히 설레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좋은 아비투스를 의식하면서, 몸에 익히고, 배우고, 터득하며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즐겁다.

4852는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코리나 크로이츠의 『아비투스』를 읽고 쓴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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